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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중

#3 발리 우붓이라면 논밭트레킹을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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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느덧 발리 삼일차에 접어들었다.

첫날은 숙소 찾고 교통체증과 매연에 적응 못하고 하루를 그냥 보냈고 그다음 날부터는 대략적인 루틴이 생겼다. 한 달가량을 같은 곳에 머물려면 한꺼번에 너무 많이 보려고 하지 않고 천천히 일상과 섞여야 질리지 않고 건강한 한 달 살기가 될 것 같아서 차츰 일상의 루틴을 완성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이건 지난 영국에서 거의 세 달을 살면서 느낀 점이었다.

 

발리 삼일차의 루틴(?)

일어나면 조식을 먹을 수 있는 카페를 찾아 느긋한 아침식사를 즐긴다. 정말 느긋하게 한두 시간쯤을 보낸다. 여긴 대부분 그런 듯하다. 그래서 아침식사 장소는 가능하면 중심지의 소음으로부터 조금은 거리가 있는 조용한 곳을 찾았다. 사실 구글로 찾아두긴 했는데 막상 가보니 가보고 싶은 외관이 아니라 뒷걸음질 친곳도 있다. 아, 발리의 식당과 카페들은 다른 곳보다 평점이 좀 높은 것 같다. 속지 말고 취향에 맞게 찾아가는 게 좋다. 평이 좋은데 내가 아닌 곳도 은근히 많더라. 그리고 위생은 어느 정도 접어두자. 그래야 속편 하다. 아니면 한국에서의 기준으로 평가하자면 아무것도 못 먹을 것 같다. 

 

아무튼 느긋한 아침시간 후에 잠깐의 아이쇼핑 타임이 있다. 여기서 대충 필요한 건 보충하고자 할 요량으로 왔기 때문에 이것저것 필요한 게 있어 대략적으로 사고 싶은 것들의 종류도 보고 시세도 탐색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2시쯤에 다시 숙소로 돌아온다. 가장 더운 시간이라 불쾌지수도 높아지고 먹거나 사는 걸 하지 않는 이상 딱히 할 건 없다. 그리고 4시 반쯤 밖으로 나간다. 이른 저녁식사를 한다. 아직은 좀 덥기때문에 또 느긋한 식사를 한다. 식사가 끝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해도 뉘엿뉘엿 (23년 12월 기준 6시 반정도 해가진다)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 산책하기 너무 좋다. 이때 나는 논밭으로 향한다.

 

오늘은 논밭에서 예술을 읽었다

제목이 좀 거창하고 오글거리지만 사실이다. 둘째 날 갔었던 논밭이 좋았었다. 가는 길에 논밭을 뷰로 하는 멋진 갤러리도, 은세공소도, 카페도 그리고 식사도 했었다. 그래서 오늘은 다른 루트로 나가봤다. 시끄러운 우붓 메인 도로에서 좁은 길을 따라 한 오분정도 지나서 코너를 돌았을 때 논밭과 함께 스산한 집이 나타났다. 

우붓갤러리를 소개합니다

 

빌딩은 폐허인 것 같은데 사람이 사는 흔적이 있어 보였다. 단순 걸인이라고 생각하기엔 이런저런 문구가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데 하고 지나 칠 때쯤 작품들이 몇 개 놓였고 갤러리가 써져있질 않는가. 이리로 들어오라는 화살표에 팔랑팔랑 거리는 커튼이 건물 안쪽도 궁금해졌다. 그래서 아무도 없고 무섭지만 커튼을 열어졌혔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누워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놀라서 나도 모르게 인사를 했고 인사를 받아주고 짧은 대화를 나눴다. 

 

여기 사세요?  - 네 여기 살아요?

언제부터 사세요? 발리엔? - 발리에 온 진 12년 됐어요

여긴요? - 여긴 1년 전부터 살아요

어떤 이유로 발리에 오게 됐어요? - 그게 설명하기 어렵고 결정한 건 아니고 신의 뜻에 따라 여기에 정착하게 됐어요

(속으로 아... 신... 도망가자) 그럼 전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 잘 가세요

 

그 이후로 돌에 혼이 담긴 것 같고 그랬다. 그리고 나오니 눈앞에 펼쳐진 논밭!!!

 

 

논밭이 발리 답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알던 논밭은 논밭의 기능에만 충실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먹을 벼를 심어 황금빛으로 물들면 베는 그 벼가 자라는 곳이 아닌가? 근데 여긴 논밭에 지어진 허물어가는 집의 모습도, 그 벽을 감싼 벽화도 예사롭지 않았다. 논밭을 가로지르는 길도 그냥 길이 아니었다.

 

순간 눈을 의심했다.

 

누가 살까? 지붕 위에 나무는 어떻게 심은 거지? 왜 그랬을까? 사진 찍으면 실례가 되려나? 등등 수많은 질문을 들게 하는 집이었다.

 

누구의 초상화인가?

 

논밭에 떡 하지 자리 잡은 집 한 채. 그 벽을 채운 누군가의 초상화도 멋진데. 비가 올 듯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말랑말랑 해지는 기분이다. 아무도 없고 오롯이 혼자 즐기니 그 값어치가 배가 되는 듯하다. 아주 가끔 마주치는 여행객들도 반가워 인사하게 되는 그런 날이었다.

 

 

눈을 자꾸 아래로 향하게 만드는 길

그리고 내가 걷는 길엔 누군가가 적어놓은 글들로 가득하다. 이름만 적은 것도 있고, 명언을 적은 사람들도 있고, 번역이 안 되는 글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Dancing in the rain, don't wait until storm end"라는 글을 만나고 몇 번 되뇌었다. 

길마저 사랑스럽다.

 

 

이렇게 모든 게 완벽했던 우붓에서의 논밭 산책길이 오늘은 너무 좋았다. 벌써 갈 곳이 다 소진된 건 아닌지 걱정이 들다가도 이런 즐거움이 문뜩 떠올라 위안이 되고 하는 그런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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